7일천하

일상! | 2008/07/31 14:28 | 남상규
음.. 벌써(?) 두 번째 글이네요. 7일천하, 이게 무슨 말일까요? 갑신정변 아시죠? 비록 실패했지만 정변이 일어난 3일 동안을 '삼일천하' 라고 말하곤 하죠. 이제 아시겠죠?
그런데 뭐가 7일 '천하' 인지 궁금해 하실 줄 압니다. 제가 첫 포스트 남길 때 말씀을 드렸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1주일 전에 여자친구가 생겨 버렸었어요. "아싸, 나도 이제 솔로탈출이다!" 하고 좋아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죠? 7일만에 broke up!
글쎄요, 음... 그 ex-girlfriend를 L양이라고 합시다. 닉네임도 L도 시작하고 실명의 이니셜도 L로 시작하는군요. L양은 그러니까, 한 2년 됐나요? 중학생 때, 온라인 게임 마비노기에 푹 빠져 있을 시절입니다. 마비노기 웹사이트에는 서버별 유저게시판이 있습니다. 같은 서버의 유저들끼리 친목을 나누는 공간이지요. 가끔은 싸움이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어쨌든, L양은 그곳에서 만났지요. 유저 게시판에 자주 들르는 사람들 끼리 MSN 메신저 주소를 하곤 했는데, L양이 그 대상 하나였지요. 사실 마비노기를 접은 뒤에도 MSN을 통하여 다른 분들과 소통하곤 했었습니다. 마비노기가 다시 하고 싶으면 한 번 시간내서 다 같이 다시 보기도 하고요.
어느새 고등학생이 됐습니다. 저도 그랬고, L양도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 라는 다짐을 새겼지요. 잘 됐다 싶어서 서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알려주며 도와줬습니다. 음... 그러다 보니 단순한 지인 이상으로 여겨지는 겁니다.^^
차례의 내신전쟁(중간고사, 기말고사)을 마치고 저는 미국으로 훌쩍 왔지요. 휴대전화는 자동로밍 시켰습니다. 그렇게 주말을 보내다 보니 L양에게 문자가 오더라고요. 성적 잘 나왔다, 이거 혹시 꿈인가 하는 내용의 문자였습니다. 그렇게 문자를 주고받다가 L양이 장난으로 선물 사달라고 했습니다. "그래, 사다 주자." 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그래, 선물 사줄게. 뭐 받고 싶냐. 초콜렛 되게 큰 거. 그거면 돼? 응! 그거면 돼 완전 좋아. 그래, 그럼 언제 한 번 만나자. 이건 데이트 신청인가!
'이건 데이트 신청인가!' 라는 문자를 받았을 때 음.. 갑자기 설레더군요. 사실 이전까지는 '친구' 라고 생각했었는데... '데이트' 라는 단어를 봤을 때 느낌이 이상했다고요. 일단은 '아니여 선물 달라면서여' 이렇게 문자를 보냈었지요.
'데이트? 나도 그런 거 해 보고 싶은데.'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지금이 학업에 매진해야 할 때이긴 하지만 학창시절에 추억 하나쯤은 만들어 보고 싶었거든요.
갸우뚱. 하고 조금 지나서, 지난 수요일이군요. 참 무드 없게 그냥 여자친구 해 주면 안 되냐고 문자메세지를 보냈습니다. 누가 사랑고백을 그렇게 하냐고 묻겠지만 나름 진지했었습니다. 제 특이한 면 중 하나지요. L양은 당황하더니 "오늘이 첫날인가.." 라는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예, 뭐. 행복했습니다. 나도 여자친구라는 게 생겨보는구나.
그런데 L양이 말하기를 자기는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거나 22일 같은 기념일 챙겨주는 도저히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괜찮았습니다.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저도 22일 같은 걸 챙겨주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했거든요. 사람이 장난감도 아니고 말이죠, 22일 사겼다고 다행이라고 챙겨주는 모습은 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이야 할 말은 없지만 생각은 그러했습니다.
그렇게 여러차례 문자메세지를 주고 받고 전화도 했습니다. 직접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L양한테 양해를 구했습니다. 이 정도는 좀 받아들여달라고 말이죠. 마지못해 했겠지만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한 번씩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어제 MSN 메신저에서 더 이상은 못 하겠다고 L양은 말했습니다. 이번엔 제가 적잖게 당황했습니다. 왜 이래. 오히려 변한 건 너였어. 말투도 느끼해지고. 난 너 좋아하는 감정도 없었고... 미안해. 행복해. 이렇게 말하고 L양은 로그아웃했습니다.
아쉬웠습니다. 참 잘됐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어쩌면 7일 째에 끊어줘서 참 고맙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늦었더라면 분명 더 많이 마음아파 했을 겁니다.
선물은 받아가달라고 문자메세지를 보냈습니다. 됐어 너 가져. 그래도 이건 고백하기 전에 약속한 거니까 받아줘라. ㅇㅇ 알았어. 야 그럼 우리 그냥 7일 전으로 돌아가는 거다? 네가 원한다면야.
그렇게 저는 '7일천하'를 뒤로 하고, 잠시나마 들떠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습니다. 남들한테 말하기는 체면이 안 서지만 저에게 나름 값지다고 말할 수 있는 추억을 남겨준 L양,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